AI 고전번역학, 고전 인문학의 새로운 실천 (율곡 제100호)
1. 인공지능의 도전
오늘날 고전 인문학 연구자들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디지털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있다. 한문 고전 데이터베이스는 더 이상 특정 연구기관이나 도서관에 국한되지 않고, 개인 연구자의 책상 위로 들어왔다. 검색과 열람, 대조와 분석은 이제 일상의 연구 과정이 되었고, 우리는 어느새 디지털 세계의 일원이 된 듯한 감각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채 체화되기도 전에, 인공지능이라는 또 하나의 급격한 전환이 찾아왔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가 인간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는다’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제 인공지능은 복잡한 문맥을 해석하고, 긴 한문 문헌을 읽어 초벌 번역을 제시하며, 그 결과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까지 묻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우리가 오랫동안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여겨왔던 인문 지식의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능력은 놀라움과 함께 적지 않은 불안을 안겨준다.
교육 현장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이미 일상이 되었다. 학생들은 교수에게 질문하기보다 인공지능에게 먼저 묻고, 제출되는 리포트 상당 부분에는 인공지능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교수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고, 연구자들 또한 자신의 전문성이 어디까지 유효한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고전 인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충격은 인공지능이 한문을 매우 능숙하게 읽고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쳇지피티, 제미나이, 끌로드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은 박사급 연구자가 며칠씩 공들여야 할 분량의 한문 문집 기사 초벌 번역을 단 몇 분 만에 수행한다. 인공지능 덕분에 우리는 기존의 연구와 번역 작업을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편리함은 동시에 불편한 질문을 동반한다. 우리가 오랫동안 해오던 ‘번역’이라는 일이 과연 같은 의미로 존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한문 고전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에게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하다. “미래에는 누가 고전 번역을 하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인공지능”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번역의 주체가 인공지능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의 등장은 번역의 주체를 소수의 전문가에서 고전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충분한 호기심과 탐구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고전 텍스트 해석을 시도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에 있다. 인공지능은 언어 처리 능력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그 언어에 담긴 지식의 정확성과 깊이까지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번역과 해석은 언제나 검증과 비판을 필요로 하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오히려 왜곡된 지식이 확산될 위험도 존재한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일반 독자와 고전 지식 사이의 주요 매개가 된다면, 전문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인공지능이 잘못된 지식을 말하지 않도록, 그리고 의미 있는 지식이 생성되도록 인공지능을 가르치고 관리하는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고전 인문학의 미래를 다시 묻게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고전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고전 연구자의 전문성은 어디에 자리 잡아야 하는가?
2. AI 고전번역학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AI 고전번역학’이라는 실천적 연구·교육 활동을 제안한다. 30년 전 ‘인문정보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문학과 정보기술의 결합을 시도했을 때처럼, AI 고전번역학 역시 낯설고 도전적인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동안 축적된 인문정보학(디지털 인문학)의 경험은 오늘날 고전 인문학이 인공지능과 협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AI 고전번역학은 인공지능 시대에 새롭게 정의되는 고전 전문가의 역할을 중심에 둔다. 이 새로운 전문가는 단순히 한문을 현대어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번역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정·보완하며, 그 과정을 구조화된 지식 데이터로 축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고전을 번역하는 학문’에서 ‘인공지능이 고전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설계하는 학문’으로의 전환이다.
AI 고전번역학에서 중요한 것은 번역 결과 그 자체가 아니다. 인공지능의 제안, 인간 연구자의 판단, 검증된 수정과 보완, 그리고 이를 XML이나 데이터베이스와 같은 구조화된 형식으로 정제하는 과정이 핵심이다. 이러한 데이터는 다시 인공지능의 학습 기반이 되어,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고전 지식 생성으로 이어진다. 이 순환 구조 속에서 고전 연구는 개인의 성과를 넘어 공공적 지식 자산으로 확장된다.
2026년 3월 전통문화연구회가 개설하는 ‘AI 고전번역학 전문과정’은 이러한 학문적 구상을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과정은 인공지능과 협업하는 한문 해석 능력, AI 결과를 비평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신뢰 가능한 고전 지식 데이터를 설계·축적하는 역량을 함께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고전 인문학이 인공지능 시대에도 지식 생산의 중심으로 남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자 제안이다.
3. 고전인문학의 새로운 과제
인공지능의 시대는 고전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전환의 시기이다. 고전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열릴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AI 고전번역학은 이러한 전환기에 고전 인문학이 지켜야 할 핵심 가치와 새롭게 실천해야 할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시도이다.
율곡국학진흥원이 수행해 온 강원도 지역 기반의 고전 번역·연구·간행 사업은 이 새로운 흐름 속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지역의 인물, 문헌, 문화유산과 관련된 정밀한 번역과 연구 성과는 향후 인공지능이 이 지역의 관점에서 한국학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가 된다. 한 편의 번역, 하나의 해제는 더 이상 책 한 권으로만 남지 않고, 미래 세대가 활용할 지식 인프라의 일부로 축적된다. 축적된 연구 경험과 번역 성과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 연구자의 판단과 책임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고전번역학은 어느 한 기관이나 개인의 과제가 아니다. 전통 지식의 계승과 발전을 사명으로 삼은 여러 기관과 연구자, 그리고 고전에 관심을 가진 시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미래 과제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이 새로운 실천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고전 인문학의 미래는,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율곡국학진흥원 소식지 『율곡』 제100호, 2026. 3.)
